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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만희(萬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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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845회 작성일 21-06-21 21:30

본문

파명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만희(萬希)파

상제(상齋)

파조

만희(萬希)

여운(汝雲)

세수

51세손

시대

고려

정보

후손들이 제주도 에 많이 산다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만희(萬希)파

자(字)는 여운(汝雲), 호(號)는 상제(상齋), 공민왕 때 대언(代言)을 거쳐 좌찬성사, 삼중대광도첨의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수차에 걸쳐 불렀으나 항절(抗節)하고 나가지 않아 제주로 유배되었다.

고려때 좌헌납(左獻納) 좌찬성(左贊成) 도첨의 문화찬성사 (都僉議 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이씨왕조가 들어선후 좌정승(左政丞)의 벼슬을 내려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아 제주도 애월현(涯月縣) 에 유배되시어 여생을 마치셨다 많은 시(詩) 남기셨다.

공(公)의 후손들이 제주도 에 많이 산다. 후손(後孫)으로는 휘(諱) 익철(益喆) 숙종 을미년에 무과(武科) 급제 하시어 통훈대부 행 중림도찰방(通訓大夫 行 重林道察訪)오위장 (五衛將).되시고 증(贈) 가선대부 공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 에 추증 되셨다   아드님 휘(諱)종보(鍾輔) 는 무과급제하시어 통정대부 전주 중군(通政大夫 全州 中軍),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함경북도 병마우후 겸 토포사(咸鏡北道 兵馬虞候 兼 討捕使) 휘(諱)종식(鍾軾) 은 월여진병마절제사(月呂鎭兵馬節制使)부호군(副 護軍)이되시고 증(贈)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에 추증 되셨다. 휘(諱)종집(鍾輯) 은 영조경오년에 만호(萬戶).용양위부호군.절충장군 오위장(折衝將軍 五衛將)을 지내셨다.

휘(諱) 기휴(沂休) 오위장(五衛將)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휘(諱)  종관(鍾輨)의 아드님 이시며 철종4년 무과급제 하시어 명월만호(明月萬戶).오위장(五衛將)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겸 나주진우영장 토포사(折衝將軍 行 龍驤衛副護軍 兼 羅州鎭右營將 討捕使)고종14년(1877)년 격포진수군첨절제사(格浦鎭水軍僉節制使)고종17년 가선대부 행 용양위호군(嘉善大夫 行 龍驤衛護軍)고종28년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를 지내셨다 공(公)이 격포 첨사(格浦僉使)시절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김해 김씨의 시조는 서기 42년 가락국을 세운 金首露王이며 좌정승공파 제주 입도조는 金萬希(一名 景興 : 1314∼1404)이다.

그의 字는 汝雲, 호는 척재( 齋)·월포(月浦)이다.

제주도의 '제주선현지'(1988)와 한라일보의 '선현의 고향'(1989. 5.)그리고 金海金氏璿源統合大同世譜(1889)에 수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의 절조 있는 遺臣으로 이태조의 간곡한 부름을 뿌리치고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는것은 충신의 수치라하여 초개와 같이 벼슬을 버리고 태조 2년(1393년) 10월에 유배되어 濟州四賢으로 추앙 받은 대표적 선현의 한 사람이다.

황해도에서 출생한 그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다음 左獻納左贊成의 요직에 올라 영달이 보장되었으나 李存吾가 중심이 된 辛旽을 축출하는 내용의 疏斥事件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 辛旽은 반역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수원에서 참형을 당했고 김만희는 복직되어 左政丞의 顯職에 올랐으나 병을 사칭하고 出仕하지 않은 채 고향인 兎山月城으로 귀향하고 말았다.

1388년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최영 장군이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정치적 실권이 위화도회군을 한 이성계에게 돌아가게 되자 고려의 국운이 이미 돌이킬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古西山에 숨게 말았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그는 杜門洞諸賢의 한 사람으로 꼽히어 '諸賢錄'에 그 이름이 수록(두문동 72인에는 게재되어 있지 않음)되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그를 重臣으로 기용하기 위해 여러 차례 불렀으나 '忠臣은 不事二君'이라 하여 이에 불복, 出仕하지 아니했다. 이러한 절개 때문에 유배로서는 가장 무거운 형벌인 제주도 유배의 벌을 받게 되었다. 80세의 고령으로 유배인이 되어 제주에 당도한 그는 애월포를 거쳐 곽지악에 은거하면서 주경야독으로 인생의 무상을 달래며 충효의 길과 사람의 正道를 주위 사람들에게 가르쳐 학문의 바탕을 이 땅에 심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려의 충신이었던 자신의 이름을 유배인의 신분으로 호칭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하여 '景興'으로 개명하고 호까지 입도한 지명을 따라 '月浦'라 고쳤다 한다.

그러나 金萬希에게는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제주에 유배되기 전 아들 赫과 대부인 黃氏를 고향에서 사별했던 그는 손자 禮를 데리고 유배길에 올랐었고 11년에 걸친 낯선 땅에서의 황혼기를 유유자적하면서도 정치에 대한 환멸과 망국민으로서의 有限을 달래기 위해 후손에게만은 자신이 걸어온 전철을 답습시키지 않고 새로운 新開地를 열어가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손자인 禮와 증손인 奉을 제주에 남겨 두고 홀로 귀향길에 올랐으니 이 때가 그의 나이 91세였으며 이듬해 7월 6일에 세상을 떠났고 황해도 월성군 토산땅에 안장되었으며 李美(경주 이씨), 韓 (청주 한씨), 康永(신천 강씨)과 더불어 濟州四賢으로 추앙 받고 있다.

이후 선조의 松竹같은 충절은 증손인 奉까지 이어져 세종조에 淸臣之孫이라 하여 禮曹參判으로 천거되어 소명을 받았으나 曾祖의 충절을 끝내 계승하여 관직을 사양하였다. 金海金氏 左政丞公派가 名族으로서 다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6세손 繼瓚이 禦侮將軍, 司僕司正의 벼슬에 오르고 그 아들 用砥가 8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곧 '邦'자 돌림으로 유명한 세칭 八邦이다.

종친회에서는 입도조 묘가 북녘에 있어 참배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81년 12월에 入島 3세 金禮(실질적인 입도조)와 부인 密陽朴氏의 묘소가 있는 곽지악 기슭에 '高麗三重大匡僉議左政丞金海金公萬希神道碑'와 2세 赫의 壇享碑를 세워 성역화하고 있다.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만희(萬希)파  항렬표

시조로부터세수/파조로부터세수

70/20

71/21

72/22

73/23

74/24

75/25

76/26

77/27

78/28

79/29

80/30

81/31

 

○培/배

鍾○/종

○澤/택

根○/근

○炫/현

在○/재

○鎬/호

淳○/순

○杓/표

炯○/형

○均/균

錫○/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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