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判書公) 불비(不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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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명 | 판서공(判書公) 불비(不比)파 | 호 | 신묵재(愼黙齋) |
파조 | 불비(不比)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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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 | 51세손 | 시대 | 고려 |
정보 | 창원군(의창군) 동면 산남리에서 태어났다 |
판서공(判書公) 불비(不比)파
김해인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초기에 이르는 문신(文臣), 호(號)는 신묵재(愼黙齋)이니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後孫)이다.
창원군(의창군) 동면(東面) 산남리(山南里)에서 태어나 일찌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 수학(受學)하여 장차 학문(學問)을 성취(成就)하니 국내(國內)에서는 그의 학문(學問)에 비견(比肩)할 사람이 없다하여 불비(不比)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이윽고 관직(官職)에 나가 봉상대부(奉常大夫) 전리총랑(典理總郞)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歷任)하고 마침내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올라 있다가 세상(世上)을 마치니 지금의 동면(東面) 금산리(琴山里) 금동부락(金洞部落) 뒷산에 묘(墓)가 있다. 유고집(遺稿集)을 비롯한 일체의 문헌(文獻)이 병화(兵火)에 소실(燒失)되었으므로 그밖의 기록(記錄)이 애석(哀惜)히도 오늘에 전(傳)하지 아니한다.
판서공파(判書公派) 유래(由來) 및 입향(入鄕)
조선 태조朝의 이조판서(吏曹判書) 불비(不比)를 파조(派祖)로 하며, 6세손(世孫) 응일(應鎰)·응(應) 박 두형제가 임진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응일(應鎰)은 전사하고 응(應)의 자(子) 김춘인(金春仁)이 경남 창원에서 용암면(龍巖面) 용계리(龍溪里)에 정착하였다. 동명(洞名)이 사릉(蛇陵)이였으나 춘인(春仁)의 호(號)인 용계(龍溪)로 개칭하게 되었고 배만이라 부르기도 하며 후손은 배만과 선남면(船南面) 신부리(新夫里)에 거주하고 있다
중조 불비는 김수로왕의 51세손이며 고려말에 판서를 지내셨고 이태조가 영의정벼슬을 내리며 불러도 받지 않으셨다. 정포은(鄭圃隱)의 문인이시고 변계량(卞季良)과 사귀셨다.
아드님 수광(秀光)은 수원부사, 손자 석공(錫貢)은 현감을 지내셨다.
금산, 서울, 능주, 청주에 후손이 산다.
※ 판서(判書) : 고려시대 각 관청의 6조(六曹)의 으뜸벼슬로 정3품관 / 조선시대 6조의 으뜸벼슬로 정2품의 관직(官職). 지금의 장관.
판서공(判書公) 불비(不比)파 항렬표 | 시조로부터세수/파조로부터세수 |
67/17 | 68/18 | 69/19 | 70/20 | 71/21 | 72/22 | 73/23 | 74/24 | 75/25 | 76/26 | 77/27 | 78/28 | 79/29 |
炳○/병 | ○彩/채 | 鎔○/용 | ○洙/수 | 秉○/병 | ○燮/섭 | 圭○/규 | ○鎭/진 | 浩○/호 | ○榮/영 | 炯○/형 | ○載/재 | 鎬○/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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