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붕만(金鵬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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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붕만(金鵬万) 자는 봉서(鳳瑞). 호는 남헌(南軒). 금녕군 목경(牧卿)의 10세손. 임란공신 황(璜)의 아드님. 고흥출신. 무과에 올라 제주판관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두남(斗南)을 데리고 부친 황(璜)을 따라, 이충무공 막하에로 달려가 누차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들을 데리고 부친과 함께 한산도 싸움에 나아가 분투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에 두남(斗南)은 삼척검(三尺劍)을 휘두르며 적중에 뛰어들어 왜적 수십명을 베고 순국하니 충무공이 한탄하면서 "내 김부자를 잃으니 군진이 빈 것 같다."고 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고 금산의 대첩단(大捷壇)에 제향되었으며 1933년에 후손들이 고흥군 두원면 예희리에 비각과 삼연제(三然劑)를 지어 제향하고 있다.(호남삼강록. 임란공신록. 금곡지. 고흥군지. 대한충의효열록) 고흥군<역사적인물> 무과(武科) 김붕만(金鵬萬) 김해 참봉 세걸(世傑)의 손자로,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거(居)두원 예회 고흥군<역사적인물> 충훈(忠勳) 김붕만(金鵬萬) 김해 자(字)는 봉서(鳳瑞)이다. 영진(永珍)의 후손으로 무과에 진출하여 정유재란때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누차 공을 세우고 한산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진석(鎭碩)이 있다. 거(居)두원 예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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