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손(金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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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충국(忠國), 호(號)는 율은(栗隱),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교수(敎授)를 거쳐 공민왕(恭愍王)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존오(李存吾)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남황(南荒)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상섬(尙書)가 되었다. 예천(醴泉)의 표절사(表節祠)에 제향(祭享). 김손(1304-1389)은 하리면 율곡리 큰밤실 마을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저(佇), 자는 충국(忠國), 호는 율은(栗隱), 본관은 김해, 율은파의 시조, 최영(崔塋)의 생질, 우탁(禹倬)의 제자이다. 1322년(충숙왕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 학교의 교수(敎授), 감무(監務), 보문각 지제교(知製敎) 등을 거쳤다. 1361년(공민왕 10) 12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을 모시고 하리면 금곡2리에 와서 어림성(御臨城)을 쌓았다. 그 후 안동, 상주, 청주 등을 거쳐 개성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공신이 되었다. 이어서 예부 상서(禮部尙書)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하던 중 이존오(李存吾)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갔다(1367). 그 후 대제학,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올랐는데, 공민왕이 시해되자 1375년(우왕 1) 1월에 예천의 사동(巳洞)으로 와서 양지쪽에 집을 짓고 그 곁에 남하정(南下亭)을 지은 후 밤나무를 천여 그루 심어 울타리를 삼아서 밤실이라 마을 이름을 고쳤다. 몇 년 뒤 대호군(大護軍)을 다시 제수 받았으나(1378), 이듬해 벼슬을 그만 두고 예천 집으로 돌아왔다. 풍성군(豊城君)에 봉해졌으나(1380), 고려 말의 정치 혼란을 틈타 이성계가 왕이 되려 하자, 김손은, "내 마땅히 그를 죽여 고려의 왕실을 지키리라."라고 결심하고, 1389년(공양왕 1) 11월에 여주에서 귀향살이하고 있던 우왕을 만났다. 우왕은 울면서, "답답하다. 여기서 고스란히 죽을 수만은 없다. 이성계를 없애달라."라고 하며 한 자루의 칼을 김손에게 주었다. 그러나 일이 탄로가 나서 김손은 잡히고 말았다.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고려충(高麗忠)"이라고 세 번 울었다. 무덤은 용문면 능천리 능내 동쪽 언덕에 있고, 보문면 미호리의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었다. 김손의 증손 계원(繼元)이 윤상(尹祥)의 증손자의 사위가 되어 장인 윤수생과 함께 미호리에 정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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