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암(金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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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암(金巖) | 호 | |
파명 | 자 | ||
관직 | 시대 | 신라 | |
정보 | 한국 최초의 역술가 |
김암(金巖)
양왕 이후 가락국 왕세계를 보면 [삼국사기]는 '구형(仇衡)-무력(武力)-서현(舒玄)-유신(庾信)-삼광(三光)-윤중(允中)-장청(長淸)' 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김암(金巖)은 장청의 서동생이니 흥무왕의 현손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방술서(方術書)를 공부하는데 호기심을 가졌으며, 소년시절에 이찬(신라 17관 등급 중에서 둘째위계)이 되었다. 당나라에 들어가 음양가법(陰陽家法)을 습득하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저술하여 스승에게 보였더니 스승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한 지식이 여기까지 이른줄은 몰랐다' 고 하면서 그 후로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공왕때 귀국하여 사천박사(천문을 맡아보는 지금의 기상대)가 되었고, 지금의 양산,진주, 광주(경기도)등의 태수를 역임하고 패강진(浿江鎭:평양)의 두상(頭上:태수와 동위인 관직명)이 되었다. 가는곳마다 극진한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농무(農務)를 장려하고 여가에는 육진병법(六陣兵法)을가르쳐 사람마다 익히도록 했다. 평양의 두상(頭上)으로 있을때 메뚜기 떼가 서쪽으로 패강(浿江:대동강)지경을 들어와 징그럽게 온 들판을 뒤덮으니 백성들이 두려워 했다. 김암은 산 위에 올라가서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풍우가 일고 메뚜기가 다 죽어버리는 이적을 보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혜공왕 15년(779년)에 왕명을 받들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했으나 그 무렵 당(唐)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서로 만나서 즐거워했다. 왜인들은 비로소 김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유명인임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은 삼국통일 후 8세 기초인 33대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면서 윤중(允中:흥무왕의 손자)을 대표로하는 흥무왕(諱;김유신)계를 중앙정부에서 제거 하였던것이니, 8세기말 흥무왕계의 신원운동을 볼때 김암의 일본사신 파견은 그에 대한 정치적 추방의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김암은 우리 나라 천문학의 원조이며 탁월한 천재임에도 관직은 늘 6두품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는 신라 조정이 흥무왕계를 정치적으로 억압한 것이라 할수 있으며, 그는 흥무왕계로서 정치활동을 한 마지막 인물이며 둔갑술과 음양가로서 가장 탁월한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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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점복가(占卜家) ·병술가(兵術家).
활동분야 : 철학
주요저서 : 《둔갑법(遁甲法)》
유신(庾信)의 증손이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음양학(陰陽學)을 연구하고, 《둔갑법(遁甲法)》을 저술하였으며, 점복술과 은형술(隱形術)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귀국 후에는 사천박사(司天博士)를 거쳐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등의 태수(太守)를 역임했으며, 다시 패강두상(浿江頭上)으로 전임되어 농민에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쳤다. 779년(혜공왕15)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의 재주를 이용하려는 일본 왕 고닌[光仁]에게 억류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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