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金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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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 해(金 垓) | 호 | 근시재(近始齋) |
파명 | 자 | 달원(達遠) | |
관직 | 시대 | 조선 | |
정보 | 조선 중기의 학자 |
김해(金垓 ; 1555~1593)의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 관찰사 연(緣)의 손자이며, 부의(富儀)의 아들이다.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신(朝臣)의 천거로 1587년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9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1월 사국(史局)에서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예안(禮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 등지에서 분전하였다. 이듬해 3월 좌도병마사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상주 당교(唐橋)의 적을 쳐서 큰 전과를 거두고, 4월 한양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적을 차단, 공격하여 대승하였으며 5월에는 양산을 거쳐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1595년 홍문관수찬이 증직되고, 1893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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