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일(金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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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극일(金克一) | 호 | 모암(慕庵) |
파명 | 삼현파 후손 | 자 | 용협(用協) |
관직 | 시대 | 조선 | |
정보 |
김극일(金克一)
선생의 휘는 극일(克一)이요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며 사시호는 절효(節孝)로 본관은 김해(金海)로서 의홍현감 김서(金서)선생의 아들이며 1382년 (고려 우랑 8년)에 태어나고 야은 길재(治隱 吉再)선생의 문인이다.
선생은 어릴 때 부터 총명하여 야은 길 재 (治隱 吉 再)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에 능통하여 학문이 매우 깊었다. 선생이 태어나기전 하루는 아버지인 현감 김 서 (熙監 金 서)선생의 광에 주자(朱子)가 현몽하여 말하기를 소학 책 한권을 건내주며 아들이 출생한 후에 이 책을 읽고 깨달어면 출천지 효자를 들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14개월만에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선생은 어릴 때 부터 효성이 지 극하였는데 10세가 되기전에 어머니께서 병을 얻어 종기가 대단하여 화농 하였는데 입으로 그 농혈(피고름)을 빨아내어 낫게 하였으며 그 후 아버지 현감 김서(金 潛)선생께서 설리를 앓아 위중 하실때 혈분의 맛을 보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한다.
선생이 당상후 30리나 떨어진 묘소인 가복(羅복)까지 조석으로 성묘하여 여막에서 시로 臺곡 하였으니 그 출천지효 (出天之孝)예 감천하였는지 하루는 여막에서 옆에 큰 범이 와서 지키드니 신생이 돌아 간때 범이 앞에 와서 타라는 시늉을 하고 등에 태우고 운폐까지 모셔다 한다. 이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하였다 한다.
선생은 벼슬이 통덕랑 (通德郎) 사힌부지평 (司憲府持平)을 지내고 후에 향리에서 아들 육형제의 교육은 물론 후학들의 계도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선생이 1456년 (이조 세조 2년 丙予)에 돌아가시니 향년 75세였다. 집의 (執義 )가 증직되고 생전의 출전지효를 칭송하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저 향리유림과 제자들이 사시호를 절효(節孝)라 하였고 청도군 이서면 서원동에 있는 자계서원 (紫溪書際)에 봉안하고 향사 하였다.
선생의 아들 육형제는 장자에 성친 김 건 (醒川 金 建)선생이고 차자 남계 김맹(南溪 金孟)선생, 삽자 김 순(金 順)선생, 사자 김인(金인)선생, 오자 김현(金鉉)선생이고 탁영 김 일손(濯纓 金馹孫)선생은 손자이고 삼족당 김 대유(三足堂 金 大有)선생은 증손이다.(참고문헌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도주지, 도주문화, 가락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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