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추(金克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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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추(金克秋) 本貫(본관)은 金海(김해)이며 호는 절봉(節峰), 直提學(직제학), 金馹孫(김일손)의 曾孫(증손)으로 1552년 4월 8일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公(공)은 勇力(용력)이 뛰어나고 經史(경사)에 통달한 文武(문무)를 아울러 갖춘 선비로 이름이 알려져 당시 光州牧使(광주목사)권율도 그를 중히 여기던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을 때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처음 梨峙戰鬪(이치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그 勳賞(훈상)으로 訓練院主簿(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그뒤에 漢城參軍(한성참군)이 되었다가 定虞衛別武士(정우위별무사)로 선발되어 權慄幕下(권율막하)에 다시 들어가 활약할 때 定忠信(정충신), 李忠立(이충립), 高成厚(고성후), 李浣根(이완근), 李世環(이세환), 朴大壽(박대수), 金致源(김치원) 등과 光主八壯士(광주팔장사)의 한사람으로 꼽혔다. 그 후 특진하여 內職(내직)으로 兵曹佐郞(병조좌랑), 軍器僉正(군기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 경성판관(경성판관), 海美縣監(해미현감)을 거쳐 永川郡守(영천군수)로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파면당하니 그를 따르던 郡民(군민)들의 탄원으로 다시 軍資監正(군자감정)이 되었다. 1605년에 宣武厚從三等功臣(선무후종삼등공신)에 策錄(책록)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입은 충산의 腫毒(종독)이 퍼져 1610년 1월 9일 향년 59세로 졸하였다.후에 左承旨(좌승지)를 增職旌閭(증직정여)를 命(명)하여 光山牛山洞(광산우산동)에 있는 三綱旌閭(삼강정여)에 모셔지고 忠南錦山(충남금산) 金谷祠(금곡사)에 配享(배향)되었다. 광주광역시 서구 * 충의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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