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金道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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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도현(金道鉉) | 호 | 벽산(碧山) |
파명 | 자 | 명옥(鳴玉) | |
관직 | 시대 | 근대 | |
정보 |
김도현(金道鉉)
1852(철종 3)∼1914.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김해. 별명은 도현(燾鉉),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 경상북도 영양출신. 성하(性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혈족에게까지 단발의 위협이 닥치자, 12월 1일부터 임동면(臨東面) 등지에서 유지호(柳止鎬)·권한모(權翰模) 등과 논의, 9일 읍에 통문을 띄웠다. 곧 안동창의진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에게 대표로 파견되어 의진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96년 1월 6일 유시연(柳時淵)과 청량(淸凉)에서 의거, 안동부로 향하여 안동의진과 합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월 16일 함창·태봉 등지에서 인근 7읍의 의진과 더불어 적과 접전, 십여명을 포살하였다. 접전의 와중에서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광주(廣州)의 김하락(金河洛) 등 의병장과 교유하였다. 3월 25일 평해의 이호성(李虎成)이 강릉의병장 민용호(閔龍鎬)의 소모사로서 방문, 청병하였다. 3월 28일 의진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출진, 4월초 삼척에서 접전하였다. 이때 황제의 해산조칙이 내려져 영남의진이 해산되자 다시 영양으로 돌아와 병영을 구축, 입암(立巖)·소청(小靑) 등지에서 접전하였으나 고종의 밀조를 접하고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영남의 선비와 상경, 을사조약반대 상소를 하고자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 순국하려고 하였으나, 동지의 만류로 실패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에는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14년 11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영해의 관어대(觀魚臺)에 나아가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남긴 《벽산선생창의전말 碧山先生倡義顚末》은 당시 자신의 의병활동 기록과 각지의 의병항쟁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어, 한말 의병활동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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