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례(金得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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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득례(金得禮) | 호 | 양와(楊窩) |
파명 | 자 | 의측(義측) | |
관직 | 병조 판서 | 시대 | 조선 |
정보 | 임진왜란 충신·공신 |
김득례(金得禮)
1581년(선조14)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절충장군 천익(天翼)의 증손. 자는 의측(義측), 호는 양와(楊窩).
무과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이 되었고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아우 득의(得義)와 함께 권을수(權應銖)의 진(陳)에 군량을 운반하였으며 울산 대천제(大川堤) 아래에서 왜적 천소(千所)등 1백여명을 죽이고 30여명을 생포하였다.
누전누첩하였고 정유재란때도 아우와 함께 울산에서 적장을 죽이고 크게 이기더니 적탄에 맞아 숨졌다. 청의장군(靑衣將軍)으로 불렸다.
선무원종공신으로 기록되었으며 철종 임술년에 영호남 유림에서 상소하여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의금부사에 추증되고 계해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이듬해 경주 동면에 활천사(活川祠)가 건립되었다.(실기 1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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